© Sammy Slabbinck '뒤로 자빠지는 의자'를 사야 한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김정운 저> p. 120 사이버스페이스는 말 그대로 텅 비어 있는 공간이다. 현상학적 지리학을 대표하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의 이푸투안 교수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공간과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을 통해 의미가 부여되는 장소를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공간은 구체적 행위나 상호작용을 통해 가치 있는 장소로 바뀐다. 집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커튼을 걷고 창문 너머의 먼 곳을 내다보는 미국식 삶이 공허한 이유는, 집이 장소가 되지 못하고 공간이 되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집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에 머무르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또 다른 지리학자인 에드워드 렐프교수는 장소 상실로 정의한다. 한국의 아파트야말로 장소 상실의 대표적 사례다. 스마트폰을 매개로 하는 상호작용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이 황량한 장소상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ㅋㅋㅋ, ㅎㅎㅎ 를 죽어라 반복하고, 각종 심란한 이모티콘을 제 아무리 화려하게 구사해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결코 시공간적 구체성을 가진 장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온종일 스마트폰만을 붙잡고 고국의 친구들이 날 기억해주길 바라는 한, 장소 상실로 인한 고약한 노인네 증후군은 피할 수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눈만 뜨면 스마트폰에 머리 처박고 사는 이 땅의 중년 남자들이 고약한 노인네가 되는 것도 한순간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등산 사진을 카톡에 올리고, 시간 날 때마다 남들 페북을 돌아다니며 좋아요를 죽어라 누르고 다녀도 장소 상실로 인한 허탈감은 메워질 수 없다. 시공간적 좌표를 갖는 삷의 구체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상의 못된 악플러 절반 이상이 중년 남자라는 거다. 의자를 사야한다! 뒤로 약간 자빠지듯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그런 의자를 사야 한다. 의자야말로 공간을 의미 있는 장소로 만드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왕과 귀족의 지배에서 풀려난 근대 부르주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들만의 의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 유명한 '치펀데일풍 의자'가 바로 그것이다. 의자에 앉았을 때, 주체로서 삶이 확인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거지 같은 (!) 성격 때문에 평생 대인관계 장애에 시달렸던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어디로 이사 가든,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1인용 가죽 소파만큼은 꼭 들고 다녔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겪게 되는 장소 상실로 인한 우울함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뒤로 자빠지는 의자'는 구원이었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한없이 기죽이는 권력용 회전의자나 검사 앞의 접는 철제 의자는 결코 아니다. 허리 꼿꼿이 세워 앉아야 하는 사무용 의자 또한 절대 아니다. TV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쓰러져 자게 되는 3인용 인조가죽 소파는 정말 최악이다. 한쪽 팔로 턱을 괴고 기품 있게 사색하거나, 턱을 만지작거리며 우아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세 나오는' 의자여야 한다. 의자는 성찰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맞은편 사람을 그윽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폼 나는 의자에 앉아서 스마트폰 따위를 만지작거리는 일은 정말 없어야 한다. 숟가락을 잡으면 뜨게 되고, 포크를 잡으면 찌르게 된다. 도구가 행위를 규정한다는 말이다. 도구는 의식을 규정하기도 한다. 아주 편하고 기분 좋게 앉을 수 있는, 뒤로 자빠지는 의자로 규정되는 의식이란 바로 '소통과 관용'이다. IT강국을 자처하는 한국에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일은 국산용 뒤로 자빠지는 의자를 대량 생산하는 일이다. 서양의 롱다리를 위해 디자인된 수입 의자에서 짧은 다리를 꼬고 앉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땅의 중년 사내들이 고약한 노인네 증후군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소통과 관용의 뒤로 자빠지는 의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뭐 ..... 순전히 내 생각이다!